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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면 두심마을 운구대(雲衢臺)

기사입력 2012-06-21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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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구대(雲衢臺)는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산23번지에 있는 바위로 2006년 1월 12일 경남기념물 제262호로 지정되었다.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줄이 있으랴(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이 시조는 너무나 유명한 고려말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단심가(丹心歌)이다.

 

포은은 고려말 조선의 건국과 태조 이성계를 섬기는데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포은과 함께 불사이군(不事二君)하지 않고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개(節槪)를 지켰던 고려 왕조의 유신(遺臣) 72명을 일컫는 두문동 72현(賢)중 한분으로 추정되는 만은(晩隱) 홍재(洪載)선생과 관련된 유적인 운구대(雲衢臺)와 운구서당(雲衢書堂)이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두심마을(상두심)에 소재하고 있다.

 

 

고려가 쇠망하고 조선건국에 동참하지 않은 홍재(洪載) 선생 일행은 당시 개경(開京) 혹은 두문동에서 남쪽지방으로 도피.은둔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홍재 선생과 동행한 두문동 72현으로 추정되는 사람으로 인근 함안(咸安)의 모은(茅隱) 이오(李午) 선생과 금은(琴隱) 조열(趙悅) 선생이 있다. 우연인지 몰라도 이름이 모두 한자(一字)이다.

 

현재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장내(牆內.담장 안)마을 고려동유적지에는 모은 이오(李午)선생의 유적들이 웅장하고 많이 현존하고 있어 1983년 경남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으며 후손들이 아직도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의 두심마을 이름은 홍재(洪載) 선생이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에 정착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산다고 하여 막을 두(杜), 마음 심(心)자(字) 두심동(杜心洞)이라 명명한 것인데 지금은 찾을 심(尋)字 두심동(杜尋洞)으로 쓰고 있다고 전한다. 

 

함안의 모은 이오(李午) 선생의 은거지가 장내(牆內) 즉 ‘담장 안’이란 뜻이고 두심(杜心)은 ‘마음을 닫다’라는 뜻이니 일맥상통하며 고려의 충절을 지키며 외부(조선사회)와 단절하는 삶은 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병에서 가회방면으로 가다보면 황매산휴게소에서 오른쪽 방향 초입에 ‘두심마을유래’ 표석이 있다. 이 길로 계속 올라가면 상두심 마을에서 가회방면으로 가는 산 중턱 왼편에 홍재(洪載) 선생의 묘(밀양 박씨 합분)가 있고 그 뒤편 큰 나무 밑에 운구대가 있으며 그 맞은편에는 최근에 중수(重修)한 운구서당과 공적비가 깨끗하게 정비되어있다.

 

운구대(雲衢臺)는 넓고 큰 바위 위에 또 하나의 바위가 얹혀 있어 그 운치와 기묘함이 인상적이다. 운구(雲衢)의 뜻은 ‘구름과 별을 벗한다’는 뜻인데 ‘운구대(雲衢臺)’라는 이름은 만은 선생이 직접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바위에는 ‘만은 홍 선생 장루지소(晩隱 洪 先生 杖屢之所)’라 새겨져 있다. 아마 후학이 만은 선생을 추모하여 ‘만은 선생이 지팡이를 놓고 쉬는 곳’이라 적은 것으로 추정한다.

 

 

운구서당(雲衢書堂)은 원래는 운구서원이었다. 1786년 조선 영조때 주변 유림들의 건의로 고려충신이기는 하나 충절의 선비정신을 나라에서도 인정하여 운구대 옆에 운구서원(雲衢書院)을 지어 1796년에 함안의 이오(李午). 조열(趙悅) 선생과 함께 홍재(洪載) 선생을 배향하던 곳이였다.

 

1871년 고종때 홍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毁撤)되었던 것을 후손들이 운구서당으로 복원관리해 오다가 수차례 중수하였으며 최근인 2001년에 홍동식(洪東植) 후손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중수(重修)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함안의 고려동유적지(산인면 모곡리 장내마을)와는 달리 지금 이곳 두심동에는 홍재(洪載) 선생의 후손은 한사람도 살고 있지 않으며, 율곡면 갑산리 3구 토포동에 선생의 후손인 풍산 홍씨 만은공파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만은(晩隱) 홍재(洪載) 선생의 字는 덕유(德楢)이고 호는 만은(晩隱)이니 안동 풍산현(豊山縣) 사람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두심동에서 가회방면으로 고개만 넘어면 첫 동네가 덕만마을이다.우연인지 모르지만 선생의 字와 호(號)를 합치면 덕만이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덕만마을 주민에 의하면 큰 덕(德)자 찰 만(滿)자를 쓴다고 한다.

 

 

또한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당시에 낙향하여 용문정(龍門亭.용주면 가호리 소재)을 짓고 여생을 보낸 류수정(柳秀汀) 선생의 호(號)도 만은(晩隱)인 것을 보면 류수정 선생도 홍재 선생의 절개를 지킨 고결한 성품을 본 받았다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아버지 홍보좌(洪保左),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 洪氏. 判開城府事 洪有龜의 딸) 사이에서 태어 났으며 부인 밀양 박씨(密陽 朴氏. 監察 朴興居의 딸)와의 사이에 흡(洽), 양(洋), 상(湘), 주(澍) 4남과 1녀를 두었다. 4남의 이름을 나름대로 해석하면 흡(洽)은 ‘두루 또는 널리’라는 뜻이고 양(洋 )은 ‘바다’, 상(湘)은 ‘강’, 주(澍)는 ‘단비’라는 뜻이니 과연 현인(賢人)이 지은 이름 답다고 여겨진다.

 

 

선생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문하생으로 공민왕 19년 기유년(136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소윤군사(少尹郡事), 판도판서(版圖判書), 예문관(藝文館).보문각(寶文閣)대제학(大提學. 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 해당)까지 올랐다.

 

운구대(雲衢臺)는 홍재(洪載) 선생의 충절(忠節)의 선비정신이 깃든 곳이다. 지금은 물론이고 후세에도 길이 길이 본받을 만한 군자(君子)의 도(道)를 가르치는 스토리(Story)가 스며있는 곳이다. 비록 바위 덩어리에 불과 하지만 방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관심있는 후손들이 운구서당과 비석(碑石) 등은 잘 꾸며 놓았는데 정작 보물이고 중요한 운구대는 누가 관리해야 하는가?  주변을 정비하여 공원화하고 훼손되기 전에 운구대의 보호각(閣)과 안내판 등을 설치하고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본다.

 

관계기관에서는 함안의 고려동유적지(경남기념물 제56호)와 창녕의 성사제(成思齊) 신도비(경남문화재 자료 제24호)의 관리상태를 비교해 보면 좋겠다고 여겨진다. 또한 합천군이 앞장서서 함안,창녕,합천 등을 연결하는 고려충신 탐방로 사업과 스토리텔링의 개발을 제안해 보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으로 추정되는 어은 이치(漁隱 李致. 陜川人)라는 분이 있고 현재 삼가면에 어은(漁隱)마을이 있는데 혹시 관련이 있는지 아시거나 자료가 있는 분이 계시면 연락바랍니다. 본 기사는 ‘합천의 전설과 설화’(합천문화원. 2008)와 인터넷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힘니다.(사진 장충길 기자)

 

혹시 잘못된 내용은 지적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연락처,055)932-0001/010-2833-1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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