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장경판전(국보52호)
다음은 국보 52호인 대장경판전에 대하여 알아보자.
중생이 성불의 세계로 나아가는 첫 관문 “모든 세진과 갈등의 차별심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유일청정한 지성심으로 부처님을 향해 들어가는 첫 관문인 일주문을 통과하여 한계단 한계단 속세에서 지은 과업을 소멸하며 108계단을 지나면 세계문화유산인 국보 52호인 대장경판전을 만나게 된다.
장경판전은 1398년(조선태조7년) 창건된 이 건물은 1458년(세조4년) 세조에 의해 중수되었고, 1488년(성종19년) 학조스님에 의해 중건되어 1965년 또 한번 중수를 거친 건물이다. 마당에서 볼 때 바깥쪽에 해당하는 앞 건물은 수다라장이고, 뒤에 있는 안쪽건물이 법보전이다. 양 건물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전까지 포함하여 4동 모두를 국보 제 52호로 지정하고 있다.
위치상으로는 일주문-봉황문-해탈문-구광루를 지나 대적광전을 등 뒤에 두고 해인사 경내의 맨 뒤쪽 자장 높은 곳에 판전 건물이 입지하므로 장경판전 건물의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판전 건물의 입지를 보면 해발1430ⅿ의 가야산 중턱에 해당되는 약 655ⅿ 높이에 서남향으로 앉아 있어 판전주변 지형은 북쪽이 높고 막혀 있으며, 남쪽 아래로 열려 있다. 따라서 남쪽아래에서 북쪽으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이 자연스럽게 판전 건물을 타고 비스듬히 스쳐 지나가게 되어있다.
특히 습기가 많은 여름 동남풍은 판전을 타고 돌아 옆으로 흘러 나간다. 또 이지점은 홍류동 계곡에서 불어온 공기의 습도가 어느 정도 떨어지는 높이 이기도하다. 이는 건물내부의 적적한 유지와 원활한 통풍에 직결된다. 특히 수다라장과 법보전 두 건물의 각 벽면에는 위아래로 두 개의 창이 이중으로 나있으며, 아래 창과 위창의 크기가 서로 다르게 돼있고, 건물의 앞면 창은 위가 작고 아래가 크며, 뒷면 창은 아래가 작고 위가 크다. 이것은 큰 창을 통해 건조한 공기가 건물 안으로 흘러 들어오게 함과 동시에 가능안한 그 공기가 골고루 퍼진 후에 밖으로 빠져 나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네건물의 규모는 북각판당(법보전)165평, 남각판당(수다라장)165평 동제판당 17평, 서제판당 17평, 보안문 1평 이렇게 해서 총365평으로 지어져 있으며 기둥수 또한 108개로 되어 있다.
이 건물은 조선초기인 1398년에 창건된 건물로 몇 차례에 걸쳐 중수를 하였으며 1964년 해체 수리를 하면서 수다라전과 법보전의 상량문이 발견되었고, 광해군 어의가 발견되어 보존하고 있다.
건물은 서남향으로 지어 직사광선을 피하고 소금.숯과 횟가루 모래를 차례로 넣어 건조와 습도를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으며, 흙바닥은 습기가 많을 때는 머금고, 습기가 없을 때는 내 보냄으로써 평균 습도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경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각목으로 마구리를 붙였는데 손잡이 역할을 하는 이마구리 부분은 두껍고 글씨를 새긴 부분은 얇게 되어 있어 경판사이의 통풍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또한 판전지붕 밑에 거미줄이 쳐지지 않는다하고, 판전내부로 벌레들이 침입하지 못한 점, 지붕위에 새가 않지 않는 점 등은 신기한 일이라 할 수 있으며 수다라장 입구에는 일년에 딱 두 번 연꽃무늬의 그림자가 생기는데 춘분, 추분 이 두날에만 그림자가 생긴다.
해인사에는 큰 화재가 7번이나 발생하였으며 그중 1817년에는 대형화재로 해인사 전체건물을 전소 시키다시피 하였으나 그래도 대장경 판전 건물만큼은 화를 입지 않아 700여년동안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다.
또다시 화재를 당할까봐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순시차 경상남도청에서 신년계획 보고를 받고 영구 보전 할 수 있도록 지하돔 형식을 구상하도록 지시했다. 극락전 아래쪽 지상.지하2층의 신판전 1동을 짓고 이전하려 하였으나 문화재 전문학자들의 적극적인 반대에 부딪쳐 판전을 이전치 못하였고, 1983년에 정부로부터 사용권을 이양 받아 해인총림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팔만대장경 또한 소실될 위기를 모면한 일들도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조선 세종때에는 왜(倭)의 끈질긴 기증요구에 중신들은 응하려 하였으나 세종의 결연한 의지로 보존되어 오다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 낙오자 900여명이 해인사에 주둔함으로써 1951년 7월 경남지구 공비토벌때 참여한 김영환장군은 동년 9월18일 오전 6시30분 지상군부대의 긴급 항공지원 요청에 따라 4기편대로 가야산 패잔병을 폭격토록 하였으나 대장경판전 안으로 모두 숨어버려 폭격하지 못하였다.
“소중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잿더미로 만들 수 없다„라고해서 팔만대장경판전에는 폭격치 못하도록 하고 가야산 넘에다 폭탄을 쏟아 부었다. 그 이후 김영환장군은 2회나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나 풀려났고, 문화유산을 지켜낸 공로를 인정받아 준장으로 진급했으나 1954년 3월5일 강릉지구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34세의 젊은 나이로 순직했다.
해인사에서는 매년 음력5월16일 김영환 장군을 기리기 위해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 시에도 우리 합천의 의병활동이 없었더라면 대장경에 대한 피해를 받았을련지도 모른다. 그러나 워낙 의병활동을 철저히 했으므로 대장경 봉안에도 큰 문제가 없었던것 같다. 국보 58호인 대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법보전 주련
圓覺道埸이 何處오!(원각도량이 하처오)
現金生死가 卽是니라.(현금생사가 즉시니라.)
원각도량은 어느 곳인가!
지금 생사가 있는 이 자리. 글씨: 南泉(남천)
◉ 수다라장 주련
四十年說이 何曾法이리요(사십년 하증법)
六千經은 獨此方이로다(육천경 독차방)
사십년 말씀이 일찍이 무슨 법문이었을까?
육천권의 경이 홀로 여기 있네! 글씨: 海岡(해강)
◉ 보안문
佛身은 法界에 充滿하고(불신은 법계에 충만하고)
法力은 難思니라(법력은 난사니라)
부처님은 법계에 충만하시고
법력은 불가사의하다. 글씨: 海岡(해강) (계속)
글: 이병생(합천문화원향토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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