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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황혼의 천왕봉'

윤한무(전 합천군의회 의장)

기사입력 2021-02-2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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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군 용주면 거주 윤한무(74) 전 합천군의회 의장이 수필 전문지 에세이스트 95호(2021년 1.2월호) 신인상을 수상하며 수필가로 등단했다. 수상작 '황혼의 천왕봉' 을 소개 한다.

 

 

황혼의 천왕봉

 

                                                                      윤  한  무

 

 내 나이 일흔넷. 가을걷이를 끝낸 어느 날이다. 여남은 살 차이 나는 지인 세 사람과 무서리 흠씬 젖은 지리산엘 오른다. 산언저리 어디쯤에서 가을 풍경이나 하루 즐길 요량이었다.

 

새벽 일찍 출발하여 산청 중산리에 이르고 보니 얼토당토않은 욕심이 인다. 천왕봉을 올라가 보자는 얘기를 슬쩍 꺼냈다. 일행은 어림도 없다는 눈치를 보이더니 나를 친형쯤으로 여기는 아우가 말을 잇는다. 형님 생각이 그렇다면 가다가 돌아오더라도 가보자고 용기를 더한다. 흔감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등산 차림은 하고 집을 나섰으니 이제 마음이 문제로다.

 

 오르는 길에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거의 다 왔다는 얄밉지 않은 하얀 거짓말도 힘이 된다. 지리산 품 안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제 몸을 말려가며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초목의 이파리들을 보며 경이로움에 감탄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여름날 그토록 뜨거운 햇살을 안고 푸르름을 뽐내던 이파리들도 천왕봉 넘어오는 바람 소리가 생황 소리를 내면 제 몸을 제가 말려야 함을 안다. 겨울을 나야 하는 씨눈과 줄기와 뿌리로 자양분을 전부 내리며 제 몸을 태우듯 말려 빛깔을 익혀가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환호를 한다. 다 말렸다 싶으면 추락과 솟음의 자유는 바람에 맡긴 채 씨눈과 줄기와 이별한다.

 

 할 일 다 한 이파리는 숲속 혹은 계곡으로 흩어진다. 나그네 발아래 부서지기도 하고 추림(秋霖) 들면 곰삭기도 하리라. 계곡을 선택한 낙엽은 물결을 안고 산 덩어리 같은 바위와 맞부딪쳐 사자의 울음소리 내며 산을 흔든다. 만섬 옥돌로 부서졌다가 다시 물살이 되어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흘러내린다. 씨눈 하나 줄기에 맡겨 둔 것은 봄 들어 두견화 피면 이파리 다시 피우리란 믿음 하나 그리움 하나 남겨둔 채로 물새 울음 따라 망망대해까지 흘러가리라.

 

 가슴 저리도록 숨이 가빠진 나는 밀리듯 끌리듯 걷듯 기듯이 하면서 끝내는 천왕봉 정상에 올라선다. 푸른 솔잎 쓸며 천왕봉 넘어 온 바람이 시리다. 숨차게 올라오면서 흘린 땀이 속옷까지 젖었다가 말리면서 살은 시리게 느껴진다.

 

 남명선생의 천왕봉을 노래한 오언절구의 결구에서 하늘이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 않는다는 시가 와 닿는다. 천둥비 쏟아지는 날은 구름과 지물(地物) 사이에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신비로 하늘이 울어대는 것 같기도 하다. 억만년 동안 흔들림 없는 웅장한 지리산과 천왕봉은 그렇게 노래한 것이리라.

 

 올려다볼 것이라고는 가을바람에 밀려가는 구름과 나는 새들뿐이다. 오를 때도 내려갈 때도 수고의 몫은 우리 것이다. 천왕봉이 계곡 아래로 내려앉지 않을 것이요 계곡 또한 천왕봉을 넘어서지 않을 바에야 서둘러 내려서야 함을 아는 나는 일행을 재촉한다. 아우들은 형님 원 풀었다고 이젠 재촉이냐고 하는 말도 그저 고맙고 흔감(欣感)할 뿐이다.

 

 나는 걸음을 옮겨 서서히 내려서다 뒤돌아 천왕봉을 올려다본다. 오르는 것도 나 혼자 힘으로 해낸 일도 아니고 일행의 도움으로 올랐는데 이별의 아쉬움이 가슴을 조인다. 내 인생 일흔다섯 가을에도 무서리 흠씬 젖은 천왕봉을 또 만나 볼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꿈 같이 뿜어내며 주막까지 내려서는데 산마루에는 노을이 그냥 타고 있다.

 

 주막에서 잠시 쉬며 요기를 끝내고 나니 날이 저문다. 나는 아우들에게 지리산 천왕봉은 소백산맥의 으뜸 봉우리이니 으뜸 봉우리 다와야 하고 우리는 서로 친하니 우리답게 고마움 가지고 살자고 다짐한다. 내 인생 황혼도 천왕봉을 태우는 노을처럼 황홀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뜬 달은 머리에 이고 돋은 별은 가슴에 안고 밤이 늦어서야 마당엘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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